목자, 목녀 간증: 섬세하신 하나님의 계획에 순종함.

By August 10, 2017e참빛

임명 소감을 준비하면서, 캐나다에서 가깝게 지내던 친구의 한마디가 생각났습니다. 휴스턴에 가면, 서울교회라고 있는데, 그 교회가 좀 특별나다고 말이죠. 서울 교회를 가보라고 권유를 하는 건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잘 몰랐지만, 휴스턴에 도착하자마자, 목장 식구들에 둘러싸여, 다른 곳엔 눈을 돌릴 틈이 없었으니, 저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를 목장과 교회를 통한 저의 삶과 주님의 인도 하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저는 믿지 않는 가정의 2남 2녀 중 셋째로 태어나, 교회라곤 아주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갔다가 연필 한 자루 받아 온 기억 이외에는, 교회를 다녀본 적도,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면서, 평범한 학교생활과 직장 생활, 그리고 결혼을 하여 세 아이를 가진 가정을 이루게 되었고, 1999년 밀레니엄을 몇 달 앞두고, 인생의 새로운 장을 열어 보겠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아무 연고도 없는 캐나다에 정착하게 되었으며, 2011년, 휴스턴으로 근무지를 따라오게 되었고, 오늘 여러분 앞에서, 목자 서약과 소감을 나누게 되었으니, 제게는 놀라운 반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뒤돌아보면, 섬세하신 하나님은 오랜 시간 동안 계획하신 대로 저를 인도하셨고, 제가 변화될 때까지 기다려 주신 것은 물론, 구원받고 제자 되게 하셨는데, 그 과정을 크게 세 가지로 나뉘어 지는 듯 합니다.

첫째, 88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해에, 저는 휴스턴에 본사가 있는 미국계 한국 회사에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몇 개월의 연수차, 휴스턴을 방문합니다. 처음 미국에 오니, 모든 것이 낯설었지만, 총각에 혈기 왕성했던 저는 그야말로 아쉬운 게 별로 없던 자유로움을 만끽하면서 생활하던 중, 교회에 다니신다는 두 분이 저를 찾아 옵니다. 믿음에 관심이나 필요도 느끼지 못하던 저는, 찾아와 주신 성의에 이야기를 나누었고, 저를 위해서 기도를 해 주시겠답니다. 그런데, 한 분은 도대체 제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기도를 하시고, 다른 한 분은 그걸 제게 해석을 해주십니다. 그런 어색한 시간이 흘러갔는데, 그중 기억나는 것은, 제가 언젠가는 휴스턴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고, 하나님을 믿는 자녀가 될 거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물론 그 말에 별 관심이 없었고, 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두 번째는, 연수 후 한국으로 돌아와 누구 못지않게 열심히 직장 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작은 일로 직장을 옮기게 됩니다. 옮기고 석 달 후, 늦게까지 일을 마친 후 저녁 식사 및 이어지는 술자리 이후 같이 동석했던 여직원을 늦은 시간에 집에 바래다주면서, 저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발생합니다. 그 여직원을 집 근처 전봇대 뒤에 세워놓고, 앞뒤 생각 없이 그냥 결혼하자고, 구혼합니다.

저야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그 여직원은 얼마나 황당했을까요? 데이트 신청도 아니고, 그냥 결혼하자고 하니 말입니다. 그 후 그 여직원은 지금까지 26년 동안 저를 위해서 중보 기도를 하는 아내가 되었습니다. 우연일까요? 그 당시, 늦게까지 근무를 하다가 저녁 자리를 만들었던 직장 선배는 저보다 1년 먼저 캐나다로 와서, 저를 교회로 인도 하였고, 이를 통하여 2000년에 예수 영접과 세례를 받게 됩니다.

세 번째는 저를 목장과 서울 교회로 인도하여 주신 목자님과의 만남입니다. 캐나다에서 Oil & Gas, 일하였던 저는, 당시 캘거리에서 일하고 계신 목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이 먼저 휴스턴으로 오시면서 목자가 되셨고, 제가 휴스턴으로 오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목장과 서울 교회를 알게 되었습니다. 영접과 세례는 받았었지만, 무늬만 크리스천이었던 저를 변화시켜 주셨으며, 서울 교회를 통하여 새로이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게 하시고 침례 받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각각의 상황과 세월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섬세하고 세밀하게 저를 위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가고 계셨으며, 지금 이 자리도 인도하심의 한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저를 어떤 방향으로 인도하실지 잘 모르지만, 과거에는 제가 인지하지 못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면, 앞으로는 어느 정도 그 과정 하나하나를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순종하면서 나아가고자 합니다.

현재 저의 믿음의 깊이는, 아직 “믿음은 결단이다”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을 부정할 만한 근거나 논리도 찾지 못하고 있으니, 방향은 바로 잡힌 듯 합니다. 이런 가운데, 작년에 한국을 방문하여 더 늦기 전에 연로하신 아버지, 어머니를 구원코자 하였으나, 휴스턴으로 돌아가야 하는 마지막 날이 되어 급한 마음에 두 분께 예수 영접을 권했습니다. 언젠가는 두 분이 하늘나라에 가시고, 그리고 제가 이 세상을 떠날 때 우리가 다시 만날 방법이 있다고 말문을 여니, 그렇기만 하면 오죽 좋겠냐고, 반신반의하십니다. 그래서 4영리를 설명해 드렸고, 밑져야 본전 아니냐고, 강권을 하였더니, 영접하시겠다 하시며, 제 기도를 따라 하면서, 예수님을 영접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제 주변의 가족들을 조금씩 변하게 하시는데, 지난 6월에 다시 한국을 방문하여, 온 가족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뜻밖에도 식사 기도를 해달라고 형님이 요청합니다.

아무도 교회를 다니지 않는 가족들이 모인 자리였지만, 그 자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희 집안에 주시는 은혜에 감사를 드리며, 온 가족의 구원을 간구하게 하셨습니다.

기도 후 아멘으로 화답하며 변화되고 있는 가족들을 보면서, 저를 조금씩 변화시켜 주시더니, 이제 우리 가족을 변화시켜 주시는 주님께 감사드리며, 제게 주어진 믿음과 은사의 분량대로 주님의 능력 안에서 순종을 다짐해 봅니다.

끝으로, 많은 사랑과 섬김으로 인도하여 주신 목자/목녀님, 초원 집사님과 목녀님, 그리고, 부족한 저희에게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시는 믿음의 선배들이신 이사말 목장 형제님 자매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모두 사랑합니다.

이사말 / 박찬규

 

우여곡절 끝에 목장이 분가되면서 남편은 어렵사리 목자가 되었고 저는 저의 생각과는 무관하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목녀가 되었습니다. 그동안 분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일 년에 반은 세 아이가 있는 캐나다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저로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 계속 난색을 표했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우리가 목자, 목녀를 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는 섬김을 받기만 하는 사람이 되는 거라면서 저를 계속 설득을 하였고 저는 언제든지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 되면 캐나다행을 반대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남편과 하고 결국 그의 뜻에 따르기로 했습니다.

저는 가끔, 지금의 남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그분께서 보여주신 사랑과 기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십 년을 훨씬 넘게 저와 제 가족들이 남편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하면서 때론, 절실하다기보다 그저 형식적으로 입술로만 기도할 때도 솔직히 가끔은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마저 땅에 떨어뜨리지 않으시고 오늘날의 남편을 만들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저는 믿는 부모님들과 형제들 그리고 지금은 엘에이에서 사역하는 동생까지 둔 그리고 하나님 외에 다른 분은 생각할 수도 없는 그런 환경 속에서 자란 반면, 남편은 비록 무교이지만 시부모님 모두 절에 다니시고 또 절에서 제사도 지내는 그런 환경에서 나서 자란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남편의 믿음은 이제 저와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처음 남편을 만났을 때, 저는 가끔은 간첩인가 아니, 외계인 인가할 정도로 우리가 흔히 아는 아주 유명한 연예인 이름조차도 모르면서 오직 정치와 하늘에 떠 있는 별에만 관심을 보이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지금도 그의 휴대전화와 아이패드에는 별을 관측할 수 있는 각종 앱이 깔렸는데 늘 그것들을 들고 다니면서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을 보며 제게 이것저것 설명하기도 하고 또 물어보기도 합니다. 지금도 가끔은 잠들기 전 침대 위에서도 그 앱을 켜고, 아! 지금 내 머리 위에는 이 별이 떠 있고 저기에는 저 별이 떠 있고 그런 얘기를 하곤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기독교에 대한 지식도 전혀 없는 그런 사람이었지요. 그런 그가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목장 예배를 인도하고 제가 이곳 휴스턴에서 산 지 겨우 3년 남짓한 시간 속에서 너무나도 변해버린 남편의 모습에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면서도 때때로 어안이 벙벙할 때도 있습니다.

여기서 잠시, 저는 남편에게 있었던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인도하심을 나누고자 합니다. 88 올림픽이 한창이던 그 해 가을, 남편이 업무차 휴스턴에 근무하면서, 우연히 만난 두 분 자매님으로부터 남편이 언젠가는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게 된다는 그런 방언 기도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남편은 그 내용을 잊고 생활을 하였고 믿는 저를 만나 결혼을 하였습니다.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저희는 태국으로 지사 발령을 받아 방콕에서 생활하였는데 남편은 그곳에서 지내는 내내 늘 교회 앞까지 저를 데려다주기만 할 뿐 단 한 번도 같이 예배를 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이후 저희는 캐나다 토론토에 이민을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도착한 지 얼마 안 되어 한국에서부터 알던 지인의 소개로 교회를 나가게 되었는데 그날 바로 등록을 하고 매주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세례도 받고 그렇게 지냈지요. 그러나, 그저 저희는 주일예배만 참석하는 무늬만 크리스천인 그런 부부로 참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내왔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남편은 일 관계로 이곳 휴스턴에 오게 되었고 그러면서 바로 휴스턴 서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침례도 받고 삶공부도 하면서 조금씩 바뀐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선 확신을 가진 건 아니었습니다. 제가 아이들 때문에 처음 3년은 떨어져 살았는데 그때 새벽기도를 다니면서 좀 보여주시라는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믿으려 하는데 잘 안 믿어 진다고. 그러나, 믿으려 노력은 한다고. 그러던 어느 날 눈을 감고 기도를 드리는데 눈 앞에 펼쳐진 아름다운 빛들이 방안에 가득했는데 그러면서 하나님을 만났다고 합니다. 88년 그해 가을, 어느 한국 분들의 기도가 이십 몇 년 만에 같은 이곳 휴스턴에서 응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저희는 또 얼마 전 그렇게 찾으려고 했는데 잘 되지 않았던 남편이 다녔다던 그 회사와 아파트를 교회 근처에서 찾아 방문도 했습니다.

지금 남편의 핸드폰에는 여러 복음 성가곡들이 다운로드 돼 있어 운전하면서 그 곡들을 듣고 또 때때로 그 성가곡들을 따라 부르기도 합니다.

성경을 읽고 늘 기도하는 그의 모습에 놀랍기도 하면서 저는 그때마다 하나님의 깊은 은혜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제는 우리가 천국에서 다 같이 만나려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어야 한다는 남편의 그 한마디에 교회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던 저희 시부모님들께서도 예수님의 그늘 아래 사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지요. 그렇게 변한 남편의 모습에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목녀자리를 피했던 제 모습은 참으로 부끄럽기까지 합니다. 앞으로 저는 어떤 식으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감당할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를 방콕, 서울, 토론토 그리고 이곳 휴스턴까지 단 한 번도 제 손 놓지 않고 함께 와준 남편에 대한 고마움과 또 깊은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제 옆에 있는 남편을 최선을 다해 도우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키가 작은 사람은 키가 큰 사람의 눈높이에 맞출 수가 없습니다. 키가 큰 사람이 그 몸을 낮추고 키가 작은 사람의 눈높이에 맞추어야만 합니다. 그렇게 또 많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경험이 적은 사람에게 눈높이를 맞추고, 나이가 많은 사람은 나이가 적은 사람에게 그 눈높이를 맞추며, 많이 가진 자는 또 적게 가진 자에게 눈높이를 맞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 높고 높으신 영광의 자리에서 낮고 낮은 우리에게 그분의 눈높이를 맞추시기 위해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지요. 그런 마음과 눈높이를 가지고 여러 가지로 부족한 저희를 섬겨 주신 목자/목녀님, 그리고 이사말 목장의 언니들과 형제님께 다시 한번 이 자리를 빌어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이사말 / 채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