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 간증: 가장 많은 위로를 주고 보람 된 일.

By July 16, 2017e참빛

지난 2월 선교잔치에 C국에 있는 선교사님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외과 의사였던 선교사님은 C국의 선교사 되는 과정에 대한 말씀을 듣던 중 전 저의 대학생 때 생각이 났습니다. 한국 대학교에는 동아리라고 특정 활동이나 취미 생활을 같이하는 모임이나 클럽 같은 것이 있습니다. 신입생환영회 때 한 선배가 자신은 무료 의료 봉사 하는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으며 그곳에 가면 아리따운 이화여대 여학생과 만남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유혹에 넘어가 동아리에 가입했고 많은 대학 생활을 동아리 활동으로 보냈기에 학창시절을 생각이 났습니다. 그렇게 옛 추억을 하면서 선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들던 중에 옆에 앉아 있던 부인이 팔꿈치로 저를 톡톡 치면서 ‘안 가?’ 하고 묻습니다. 당시에 트럼프가 미국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많은 사람이 미국에 다시 입국거절 되었다는 뉴스가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었으며, J-1 비자로 미국에 머물고 있던 전 선교 갔다가 다시 미국으로 못 들어올까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체육관에서 만난 이선근 목자님은 ‘선교 같이 가셔야죠?’라고 했습니다. 선교사님은 걱정하지 말고 실행에 옮기면 부족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거라는 말씀이 생각도 나고 선교에 가고 싶은 저의 간절한 마음에 두 번이나 옆에서 가라고 하니 하나님의 뜻인가 싶기로 하고 해서 이번 로카블랑카 단기선교 봉사에 지원하게 되었습니다.

로카블랑카 미션 베이스는 멋진 태평양 바다와 하얀 백사장 옆에 있었으며 우리가 머문 게스트하우스의 방은 웬만한 리조트보다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첫날은 우리가 선교 봉사를 왔는지 휴가를 왔는지 혼동이 될 정도였습니다.

우리는 두 마을에서 선교 봉사활동을 했습니다. 미션 베이스에서 차로 2-3시간 거리에 있던 Chayuo와 4~5시간 거리에 있던 El Moscow에서 선교 봉사를 했습니다. 두 마을 다 원주민이 사는 곳으로 진료를 위해서는 원주민어를 스페인어로, 다시 스페인어를 영어로 통역을 하면서 진료를 해야 했습니다. 이들은 진료 후 목사님을 만나서 면담을 하고 기도를 받은 후 약을 받아 떠났습니다. 두 마을 다 의료진료를 쉽게 받을 수 없는 곳이었으며 특히 El Moscow는 가는 길에 상당수가 비포장도로로 주민들이 의료시설 접근하기에 매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기억나는 몇 가지를 말씀드리면 마을의 어린아이들이 개미같이 생긴 벌레를 마치 과자 먹듯이 맛있게 먹는 모습을 목격했습니다. 그렇게 벌레 먹는 일은 일상적으로 흔히 있는 일처럼 보여 위생에 대한 개념에 이곳 주민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다른 젊은 여자는 개구리가 자신의 뒷목으로 뛰는 꿈을 꾼 후부터 뒷목에 통증이 시작했다고 왔으며 도저히 의학적으로 도움 줄 수 부분이 없기에 목사님의 기도를 위해 목사님께 냉큼 보냈습니다. 이 얘기를 로라 선교사님께 했더니 이러한 미신적인 생각이 이곳 원주민에게 많다고 합니다. 이러한 일이야말로 현대의학의 도움의 아닌 주님의 기도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El Moscow에서는 옴 환자를 처음 보게 됩니다. 저보다 10년 이상 선배 의사들은 80년 초만 해도 시골에 가면 여러 명 볼 수 있다고 하지만 전 책에서만 봤지 실제로는 처음 보았습니다. 그 환자는 생후 5개월 된 어린 아기였습니다.

일주일 넘게 배가 아프고 설사를 해도 의학적 처치를 받을 수 없었던 어린아이들도 여러 명 있었으며 그런 아이 중 기생충이나 아메바가 많다고 합니다. 오래전 우리나라에 많다고 했지만, 요즘은 매우 보기 드문 질환이 이곳에는 흔하면서도 제대로 치료뿐만 아니라 예방이나 위생이 이뤄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또 하나는 젊은 남자 학생이 일 년 동안 턱밑이 아프다고 왔습니다. 세 명의 의사가 그 학생을 보면서 고개만 기우뚱거리면서 결론을 못 내렸습니다만 그 학생은 목사님의 기도를 받고 난 후 아픈 증상이 없어졌다고 합니다. 그 학생은 초등학교 과정만 학교에 다녔으며 그 이상의 교육을 받지 않고 집에서 놀면서 무의미한 시간을 보낸다고 합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이 지내는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뜻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게 선교 간 우리의 역할 중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지난 생명의 삶 시간에 목사님께서 은사에 대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은혜로운 선물이라는 은사에 대해 말씀을 하시고 나중에 여러분의 은사를 적는 것을 시험문제로 나온다고 하십니다. 시험문제에 나온다고 하니 제 은사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면서 저의 지난 날들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초등학생 때 당시 교회를 다니던 저는 시험문제를 풀기 전에 항상 시험문제를 책상 앞에 두고 시험을 잘 보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고 문제를 풀었습니다. 하지만 기도 응답은 없었습니다. 제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는 항상 노력이 부족하다는 담임선생님의 의견이 있었습니다. 그랬던 제가 서울에 있는 한 기독교 학교의 의과대학에 입학하게 되니 지금 돌이켜보면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모교병원에서 레지던트과정을 하고 임상강사 과정까지 수료 후 전 부산에 있는 한 대학병원으로 직장을 옮겼습니다. 제가 전공하는 분야에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명의로 불리는 교수님들 밑에서 혹독한 수련을 받은 후 직장을 옮긴 터라 전 자신감을 가지고 진료를 했습니다. 점차 주위 사람에게 인정을 받아가면 갈수록 자신감은 자만심과 오만함으로 변하기 시작하면서 시련이 찾아옵니다. 치료한 환자에게 만족스럽지 않은 결과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전 그 시련을 잊기 위해 가장 먼저 찾은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술입니다. 힘든 날은 기억이 끊어질 때 까지 마시지만 제 마음속에 힘든 시련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점차 시간이 흐를수록 전 환자를 위한 진료보다는 저를 위한 진료를 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을 떨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 말인즉슨, 환자의 병을 위한 진료보다는 저를 법적으로 보호할 방법을 우선으로 선택하게 되고 또한 대학병원 교수인 전 연구에도 소홀 할 수 없기에 이 환자를 이 방식으로 치료하면 나중에 논문발표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을 이 자리에서 고백합니다. 처음 의사가 되어 가진 사명감은 점차 희미해지고 있고 환자를 위한 저의 순수한 맘은 없어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누적되어 의사라는 직업이 저에게 맞는 일인가는 하는 회의감도 들고 10대에도 없었던 사춘기와 비슷한 증상이 나타나기도 했습니다. 날마다 한숨을 쉬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휴식에 대한 열망이 강해졌습니다. 그래서 전 약 3년 전부터 연수 갈 준비를 했습니다. 연수 와서 의학 공부를 하기보다는 쉬면서 마음에 안정을 찾고 가족과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여행도 자주 다니고 골프 핸디도 낮추었으면 했습니다. 그러나, 전 연수계획에 전혀 없었던 교회를 다시 나오게 되었고 이곳 휴스턴 서울교회에서 예수 영접, 침례, 삶 공부, 허그식을 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미국에 와서 지난 1여 년 동안 한 것 중 저에게 가장 많은 위로를 주고 보람 된 일은 단언컨대 이번 선교 봉사라고 생각합니다.

전 얼마 전 이주교육에서 좋은 성경 구절을 들었습니다.

골로새서 3장 23절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

이 구절은 많은 고민을 하던 중 의사로서 제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주님께서 저에게 주시는 말씀 같습니다.

전 최근 2가지 기도 제목으로 기도합니다.

하나는 한국에 돌아가더라도 신앙생활 변치 않고 계속 유지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과 앞으로 저의 의료진료는 하나님과 함께할 수 있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여기 계신 분들도 같이 기도해주시길 바랍니다.

 메께오 / 권영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