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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최

목장 간증: 성도 목장 송혜정

By | e참빛

안녕하세요, 성도 목장의 송혜정입니다. 저희 목장은 중국 성도에서 오랫동안 사역하시던 이재근, 조은영 선교사님 부부를 후원하고 있는데요, 현재 이재근 선교사님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올해 한국에서 간 이식 수술을 받으시고 회복 중에 계시는데, 치유와 빠른 회복을 위해서 모두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희는 다섯 가정이 매주 금요일마다 돌아가면서 목장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저녁 8시에 모여서 먼저 식사를 감사하게 하고, 목자님의 교회 소식 안내를 시작으로 찬양과 매주 선교비 헌금, 은혜로운 예배를 위한 합심 기도, 목원들이 돌아아가면서 하는 시작 기도, 성경 공부 그리고 설교 요약 다음엔 준비된 다과를 먹으면서 생활 나누기. 전도 대상자와 기도 제목을 놓고 다 같이 통성 기도, 마지막엔 목자님의 마침 기도로 밤 열두 시 반쯤 목장 예배를 마치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합니다. 주일엔 예배 후 친교실에서 각자 준비해 온 간식을 먹으면서 예배 시간에 받은 은혜나 목장에서 못다 한 이야기를 하며 교제를 나눕니다. 주중에는 목장 카톡방을 통해서 서로 소통을 하는데, 목자님께서 매일 좋은 글과 영상을 올려 주셔서 은혜롭게 하루를 시작한답니다.

헌금 계수 위원으로 사역하시는 목녀님은 친교실에 잘 못 나오시는데요. 그래서 그런지 가끔 저희 목장 박근우 목자님을 제 남편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아니구요. 당연 목녀도 아닙니다. 저를 목녀인줄 아시고 “목녀님” 하고 부르시는 분들이 있는데 전에는 ‘저 목녀 아니에요.’라며 일일이 정정을 해드렸는데 언제부터인가 그냥 웃고 지나가게 되더라구요. 자주 듣는 말이라서 민망하기도 해서요.

목장과 신앙생활을 통해서 받은 은혜로는 제 삶의 가치관과 일상생활 속 태도의 변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마음가짐의 변화 등등 많은데요. 그중 가장 큰 변화라면 저에게는 남편과의 관계의 회복입니다

집안에 불상을 모시고 정화수를 매일 갈아가며 그 앞에서 예를 갖추던 뼛속까지 불교인이었던 남편. 이웃으로부터 염불 소리가 너무 은혜롭다는 칭찬까지 들을 정도로 불교에 심취해 있던 남편과 모태신앙으로 자라 온 저의 결혼생활이 평탄할 수 없었죠. 불같은 성격의 남편과 그에 못지않은 자아가 강한 제 성격이 부딪히면 대단했습니다. 그래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고 ‘하나님, 남편을 변화시켜 주세요’라며 간절하게 오랫동안 기도했는데 어느 날 우연히 기독교 방송에서 저희 부부의 상황과 비슷한 어느 자매님의 간증을 들으면서 먼저 변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 자신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당시 목장의 사정으로 지금의 목장에 오게 되면서 남편과 저에게 조금씩 구체적인 변화가 생기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저희 목자님은 목녀님을 위해 존재하시는 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목녀님을 여왕처럼 받들고 아끼며 사랑하시거든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10년 넘게 목장 생활을 하다 보니 가랑비에 옷깃이 젖듯이, 서당개 삼 년이면 풍월을 읊듯이, 제 남편도 목자님 비슷하게 닮아 가더라고요 참 감사하죠. 10년 전만 해도 모든 게 못마땅하고 싫던 남편이 이젠 나에게 자식보다 더 소중한 존재임을, 세상 떠난 뒤가 아니고 아직 둘 다 살아 있을 때 깨달을 수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선배 자매님의 충고대로 있을 때 잘하려구요. 이제 남편은 성실한 목장 성경 교사로 그리고 제가 어려운 일로 힘들어하고 걱정하면 기도로써 지원해주는 든든한 영적 동역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변화된 건 아니구요. 가끔 피곤한 일요일 아침이면 일어나면서 일반 성도들에게도 안식년이 있어야 한다며 투덜거리기도 하거든요. 그래도 예배드리고 나서 목장 식구들을 만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웃으며 즐거워한답니다.

저희 목자, 목녀님, 본인들의 삶의 무게도 만만치 않음에도 불구하고 한결같은 헌신과 섬김 신실하게 살아가시는 두 분의 삶을 보면서 저희 부부가 이렇게 조금이나마 변화된 삶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주 큰 위기와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묵묵히 신앙을 지키고 감사함으로 승화시키며 잘 견디어 내시고 영적으로 더욱 성숙해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저렇게 다르다고 생각하며 도전을 받았었습니다

목자, 목녀님 사랑합니다.

아직도 불쑥불쑥 튀어 나오는 자아, 못된 성질… 바울 사도님께서 탄식하며 하신 말씀처럼 저는 참으로 곤고한 자입니다. 그래서 아직도 갈길이 멀기만 하지만 그래도 믿음의 동역자들인 목장 식구들이 있어서 든든합니다. 쉬엄쉬엄 주시는 환경과 시험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세밀하신 주님을 사랑합니다. 어려운일이 생기면 더욱더 주님 안에서 하나가 되는 사랑의 끈으로 묶어진 우리 성도 목장 식구들 사랑합니다.

성도/송혜정

구원간증: 무알라제 목장 윤기원

By | e참빛

안녕하세요. 저는 최진영 목자님이 인도하시는 무알라제 목장의 윤기원입니다. 먼저 신앙 배경을 말씀드리면 천주교 집안에서 자라 성당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불교 유치원을 다녔습니다. 교회는 초등학교 때 짜장 떡볶이를 준다고 해서 친구 따라갔던 기억이 있습니다. 한국의 3대 종교를 다 경험해본 셈이죠. 저는 솔직히 이 휴스턴 서울 교회에 오기 전까지는 개신교에 대한 색안경을 끼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니는 곳에서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지옥 간다고 소리 지르고 조용히 하라 하면 시비 붙어서 싸우고… 먹을 거로 유인해서 교회 나오게 하는 것 같고… 이런 상황들을 보며 개신교, 교회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운이 좋게도 저는 미국 샘 휴스턴 대학교로 교환학생으로 오게 되었고 선배 언니를 통해 최진영 목자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만난 지도 얼마 안 된 나한테 왜 이렇게까지 잘 해주실까 할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다만 모든 일은 하나님이 계획하신 대로 이루어지는 것이고 간절히 기도하면 모두 응답해 주신다는 목자님의 반복된 말씀에 개신교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던 저로서는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며 불신했고 계속 하나님에 대해 듣는 것이 솔직히 부담스러웠습니다. 하지만 목자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와 개신교도 천주교와 같은 하나님을 믿는다는 생각으로 교회도 나가보고 목장이라는 곳도 나가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목장에 갔던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었던 것 같습니다.

별생각 없이 한국 음식을 먹기 위해 나갔던 첫 목장에서 저는 sharing을 하며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 앞에서 제 속마음을 얘기하고 눈물을 보였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가족보다 더 가족 같았던 첫 목장 안에서 많은 힐링을 받았고 따뜻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이후 매주 교회에 나와 많은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허리케인 하비로 입은 피해를 내 일인 양 힘써 서로 도와주는 모습을 보고, 합동 목장을 하며 제가 전에 가지고 있던 개신교에 대해 좋지 못한 감정은 어느샌가 없어졌었고 이런 분들을 닮고 싶어하는 제가 보였습니다.

10월 초에 목자님은 저에게 영접모임에 들어가 보기를 권유하셨지만 저는 그 날 영접하지 않고 나왔었습니다. 저에게 10월은 정말 다사다난했던 한 달이었습니다. 이런저런 일이 겹쳐 저한테는 너무나 힘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시기에 매주 교회에 나와 예배시간에 찬양을 부르고, 들으며 자주 울었습니다. 신기하게도 찬양을 들으면 힘든 마음이 위로되었고 잠시나마 평온해지는 것 같았고 저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힘들고 울고 싶을 때마다 집에서 찬양을 듣곤 했습니다. 그렇게 힘든 한 달이 지나고 큰 폭풍이 지나간 후 11월에 교회와 목장을 갈 때는 그 전과는 다른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예배시간이 기다려지고 그 시간이 좋았고 교회를 다녀오면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그래서 12월 영접모임에 다시 한번 들어가 보기로 다짐했고 12월 17일 침례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들어간 영접모임에서 목사님의 말씀은 같았지만 저는 그 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았고 다른 자세로 그 시간을 맞았습니다.

침례를 받기 바로 전 목장 땐 다른 목원들이 한국에 들어가게 되어 저와 목자님 단둘이서 목장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날의 sharing 시간은 영접 후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마음이 어떻게 변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었던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단둘이다 보니 제 마음을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었고 많은 진솔한 이야기를 하며 저의 조금은 변화된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목자님이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을 언급하시는 것이 마냥 부담스럽고 불편하기만 했었는데 이제는 그런 말씀들이 거슬리지 않았고 오히려 좋은 간증으로 들렸습니다. 이 시간을 통해 제가 하나님에 대한 마음이 전과는 달라졌다는 것을 알았고 목자님이 권유해 주신 확신의 삶을 통해 더 하나님께 가까워지고 싶어 2주 전부터 확신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침례를 받은 후 잠시 한국에 갔을 때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항상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루는 기차를 타고 가는 길에 문뜩 울컥하며 하나님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이렇게 한국에 올 수 있었던 것도, 한국에 와서 친척분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사소할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참 행복하고 감사한 일이구나!’라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났습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 일에 힘들어하고 지쳐있던 나에게 모든 일에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끼라는 하나님의 음성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접하고 침례를 받기 전에 간증을 들을 때에는 ‘하나님의 음성? 무슨… 말도 안 돼’ 이렇게 생각하곤 했는데 직접 내가 경험하게 되니 신기하기도 하고 하나님에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주변 친구들이 걱정, 고민이 많아 힘들다고 할 때,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내가 기도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마!.’라고 말하는 저를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전에는 크리스챤이 아닌 다른 사람에게 이런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 말하려 하지도 않고 생각조차 나지 않았던 ‘기도’라는 단어가 제 입에서 자연스럽게 나오고 있는 것이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또 저의 기도의 응답으로 친구의 걱정, 고민이 해결되어 ‘네가 기도해준 덕분에 좋은 결과 있었던 것 같아’라는 말에 다시 한번 하나님께 감사했고 제가 크리스챤이라는 것이 뿌듯했습니다.

작은 일에도 감사하고 행복함을 느낄 수 있도록, 그리고 좋으신 하나님을 만나고 전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최진영 목자님, 수호 오빠 그리고 많은 형제, 자매님들께 감사드리고 우리 목장의 VIP인 민규 오빠도 어서 빨리 좋으신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 왔으면 좋겠습니다

무알라제/윤기원

집사 안수 소감: 주님의 부르심에 순종

By | e참빛

이번 남편의 집사로의 부르심을 받고 소감문을 준비하며, 저의 인생을 보호하시고 인도해오신 주님을 되돌아보았습니다. 먼저 사춘기 어려운 가정환경일 때, 혹시나 밖으로 돌다가 안좋은 길로 빠졌을 수도 있었을 저를 친구를 통해 교회로 인도하셔서 그 안에서 사춘기 동안 보호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좋고 음악과 술이 좋아 수업은 가끔 빠져도 서클룸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들리던 대학 시절, 안티 크리스천이었던 지금의 남편을 만나서 교회에서 멀어진 적도 있었지만, 10년 후에 남편과 함께 교회로 함께 돌아오게 해주신 주님께 감사드립니다. 둘째 아이 종연이가 자폐 진단을 받기 두어 달 전 남편이 예수님을 알게 된 것도 주님의 간섭하심이라 믿습니다. 아들의 자폐 진단으로 미국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을 때, 그 많은 도시 중에 휴스턴으로 오게 된 것도 주님의 은혜 아니면 설명이 안되네요. 목장 식구였던 유재상 목자님이 남편이 다니게 될 휴스턴 대학원 1년 선배였는데, 학교에서 더 많은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힘을 많이 써주셨고, 엄재웅 목자님께서도 저희 아파트를 미리 구해주시는 등 많은 도움을 받게 하심에 감사했습니다.

저희 부부가 청운의 꿈을 안고 미국 땅을 밟은 건 아니지만, 아들 종연이에게 좀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 주고 싶어서, 그리고 큰아이에게 장애인 동생을 갖고 있어서 겪는 마음의 부담을 줄여주고 싶어서 이주를 결정했지만, 막상 정착하는 과정은 쉽지 않았고 영주권을 받고, 경제적으로 정착하는데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고, 그러는 가운데 아이들 또한 희생의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곳에서의 16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종연이의 상태는 그리 나아지지 않은 것 같습니다. 2년 전 어느 날, 아이는 방학이 되자 누나와 매일 영화관과 아이스 스케이팅 등 엑티버티 하기를 원했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는 그릇을 하나씩 깨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목장사역 열심히 한 것밖에 없는데, 저희는 아이로 인해 왜 이리 힘들어해야 하나요?” 질문하는 시간이 있었고, 이제까지 한 모든 것에 대한 회의가 왔습니다. 이때 주님께서는 “너 모든 짐 맡기고 나 따라올래?” 하시며 마음을 정하라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 이후 저희는 좀 더 아이들과 가정에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사역을 더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우리에겐 사역도 사치라는 생각을 가지며 한 발 빠져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저이기에 집사 부인으로의 부르심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했습니다 이수관 목사님께서 늘 강조하셨던, 그리고 저조차도 목장 식구들에게 강조해왔던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실 것이다” 말씀을 의지하며, 이 부르심에 순종하고자 합니다

한편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경험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내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님처럼, 주님의 주권 아래 저를 내려놓으려 합니다.

저에게 감히 예수님이 받으셨던 잔이 올리는 만무하지만,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며, 목장 식구들과 사역으로 묶어주시는 성도님들의 영적 필요를 도와주는 역할을 잘 감당하고 싶습니다. 나밖에 모르던 제가 목녀를 하면서 섬김과 희생이 뭔지 배워가고, 작은 사랑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노력했다면,

이제는 교회의 구석구석을애정 어린 눈으로 보고, 교인들과 목회자들을 위해 더 많이 기도해야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최근에 친정 아버님께서 돌아가셔서 한국에 다녀왔는데, 부모님 다니시는 교회에서 장례일정을 여러모로 도와주심을 보고 감사했습니다. 늘 멀리 떨어져 있는 부모님들을 위해 기도할 때면 그곳에 천사를 붙여 주시길 기도하곤 했는데, 저의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목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이렇듯 저는

지금 있는 이 자리에서 저에게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기도와 섬김을 다함이 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누군가에게 기쁨이고 감사임을 믿습니다.

깜뽀찌아/유양숙

집사 안수 소감: 주님이 원하시는 완벽한 사랑공동체를 꿈꾸며

By | e참빛

집사로 부름을 받고, 제가 교회를 어떻게 받아들였고, 또 어떤영향을 받았는지를 뒤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 기억 속에 첫 교회 경험은 초등학교 때 성탄절, 친구 따라 교회에 가 본 것입니다. 그 날 제가 들은, ‘크리스마스, 선물, 아기 예수, 동방에서 온 손님 등등’은 무슨 동화 속에 나오는 꿈 같은 얘기, 부잣집 아이들이나 받는 혜택으로 들렸고, 저는 주변에서 거지 취급당하는 거 같았습니다. 그 후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교회는 나와는 아무 상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점점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저를 불편하게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주일날은 안돼, 내일은 교회에 가야 해, 술-담배는 안 해….’ 등 이들은 이유가 참 많았습니다. 어느 모임이든 이들이 끼면, 문제가 복잡해진다고 생각하면서, 저는 교회를 배척하였지요. 그러다 지금의 아내를 만났습니다. 많이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녀가 교회를 다닌다는 것입니다. 헤어지면 쉽게 문제가 해결되는 데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이미 좋아져 버렸거든요. 그래서 그녀를 포기하기보다는 교묘하게 교회를 다니지 못하게 했습니다. 아내가 다시 교회로 돌아가기까지는 10년이 흘러야만 했습니다.
이렇게 적자생존의 원칙이 적용되는 세상 속에 빠져, 투쟁과 좌절을 반복하며, 30대 중반을 넘어서게 됩니다. 그제야 제 삶과 가족을 뒤돌아보며, 의미 없는 것을 쫓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에, 교회를 찾았습니다. 아파트 단지 내 교회부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후 광고가 문제였습니다 어디엔가 사 놓은 땅에 무슨 건물을 짓는다며, 각 가정당 은행 계좌를 개설하라고 합니다. 제 반응은 즉각적이고 본능적이었습니다. ‘역시 교회와 목사는 순진한 사람을 꾀어내는 곳이야!’이었습니다.

시작한 김에 한 번 더 다른 교회를 시도했습니다. 다 좋았습니다. 광고 시간에 돈 얘기도 없었고, 무슨 거룩한 말만 듣고 본당을 나오는 데 문 앞에 목사님이 서 계시면서 떠나는 성도들 하나하나 악수를 하며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흠, 목사가 저 정도는 공손해야지’하는 데, 그 건너편에서 목사 아내라고 하는 사람도 똑같이 하고 있었습니다. 평생 유교적인 집안에서 자란 저는, ‘아낙네가 왜 나서는 거지!’ 그러고 보니 남자들은 거의 없고, 여자들이 좌지우지하는 교회로 보였지요. 당연히 뱃속이 뒤틀려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았습니다.
<자매님들! 저 참 한심했죠! 믿지 않던 시절의 예를 들은 것이니 양해 부탁드립니다 안에서 지금은 여러분 사랑합니다…. 제가 그랬던 것처럼, 교회를 향한 VIP들의 태도와 반응은 당연합니다. 평생의 가치관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데, 방어하게 될 수밖에 없지요….>

그렇게 교회 쇼핑을 포기하고 있던 차에, 어떤 목사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분이 얘기하는 교회의 모습은 제가 아는 교회와 전혀 달랐습니다. 기독교적 가치관과 세계관은 참으로 신선하고 근사해 보였습니다. 뜻을 같이하는 분들은 당시 모든 분야의 전문가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이렇게 저는 교회를 무슨 사회개혁 운동가, 세련된 전문가이라 생각하고 즐기고 있었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은 없었습니다.

근사하고 세련된 신앙인인 줄 알았던 저는, 우리 교회를 오면서 박살이 났습니다. 바로 목장 때문이지요.

내가 가진 영향력을 행사하여 세상이 우리를 쫓아 오는 하는, 그런 거대한 꿈보다는,… 이번 주에는 부부가 어떻게 갈등했고, 직장에서 말이 안 통해서 힘들었고, 아이들의 시험 결과 등등 사소한 얘기가 내 삶의 전부라는 것, 그리고 그 안에서 섬세하게 나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래서 다음 주도 목장 식구의 기도로 잘 지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는 것… 이런 시시콜콜한 이야기 속에서 내가 서서히 변화된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거죠.

그러나 이때부터 새로운 내적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바로 옛속성이지요. 여러분 아세요? ‘아메리칸 드림’
시카고 불스의 구단주가 그랬다고 합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하기 싫은 것은 전혀 안 해도 되는 것”이 바로 아메리칸 드림을 성취하는 거라고요. 어떤 이유에서건 미국에 온 것은 더 편하고 풍요로움을 쫓은 것이었는데, 잘 먹고 잘사는 이곳에서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낄 때, 삶이 힘들어집니다. 저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그대로 남아 있어, 쉽게 좌절하고 분노하며, 나의 환경과 상황에 불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옛속성이 새로운 속사람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세상의 가치관을 따르는 것이 늘 쉬워 보이고, 편하며, 열매도 빨리 맺을 수 있어 보였지만,
예수님의 방법은 시간이 걸리고, 자존심 상하고, 결과도 만족스럽지 않아 보일 때가 많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 이 ‘고통의 자리로 나 자신을 옮길 준비가 되었느냐?’ 라는 질문은 늘 부담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절실했습니다.

철저히 성령님에 의지하지 않으면 실수투성이였고, 사랑이 없는 충고는 불신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 그런, 목장 사역이었습니다. ‘지저분한’ 영적 상태를 정리해야만 했습니다

쓰레기는 그 자체가 더러운 것도 있지만, 제자리에 있지 않아서 쓰레기가 되어 버릴 수 있듯이, 영적 쓰레기를 만드는 것은 ‘영적 게으름’에서 오는 것도 경험합니다. 주어진 말씀을 따르는 것을 무시하거나 타협하려 들 때, 이 쓰레기가 쌓여 갑니다.
힘들어서, 기분 나빠서, 시간이 없어서, 누가 알아줄 것도 아닌데,… 이렇게 시작되는 그 어떤 노력도 관계를 깨뜨리게 됩니다.

제가 방문했던 교회들을 다시 뒤돌아봅니다.
초등학교 때 방문했던 그 날, 목사님이 아이들에게 시키셨던 일이 생각납니다. 눈을 감고 있다가 1분이 지났다고 생각하면 손을 들라고 하시었데, 결과는 90% 이상의 아이들이 30초도 되기 전에 손을 들었다고 합니다. 저도 그 속에 속해 있었고요. 그러시면서 1분이 이렇게 긴 시간이니 소중히 생각하라 하시었습니다. 초등학생인 저는 ‘아! 교회에서는 이런 것도 가르치는구나!…’ 마음속에 각인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이 교회 저 교회를 찾아다니던 시절, 아내와 아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 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아내는 조용히 저를 따라왔습니다. 절대자에게 이미 남편이 붙잡혔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말입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파트 단지 상가의 그 허름한 교회에서는, 선교관/ 교육관을 지어 선교사님이나 다음 세대를 위해 투자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또 다른 교회는, 가부장적인 한국 사회에서 아내들이 나서서 섬김을 실천함으로써, 가정이 변하기를 꿈꾸었던 그런 공동체는 아니었을까요!

지난 1월에 한국을 방문하면서, 아내가 다녔던 모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연수 오셨던 담임 목사님께서 저를 알아보시고 성도들에게 인사해 달라고 하시어, 강단에 올라가서 ‘음…저는 이 교회를 잘 다니던 한 성도를 꾀어내 교회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든 장본인입니다’라고 사죄하였습니다.
아내는 자신보다 남편이 먼저 모교회에 방문한 것이 감동적이었나 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많은 교회가 우리 교회를 닮으려 합니다. 잘 하고 있다고 칭찬합니다. 그래서 제 마음속에 ‘티 내지 말고, 조용히 주어진 일을 감당해 내며, 선배 목자님/ 집사님들이 쌓아 놓은 대로 따라 하면 된다. 그래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해, 좋은 평가를 받으면 된다……이만하면 됐다,’라는 생각이 저를 지배할 건 뻔합니다. 저의 자아를 쳐서 죽이지 않으면, 옛속성이 다시 살아서 꿈틀거립니다.
그래서

‘최선의’ 교회가 아닌, ‘완벽한’ 교회를 꿈꾸어 봅니다.

주님이 그렇게도 원하시는 완벽한 사랑 공동체를 꿈꾸며,
철저히 성령님에 의지하여, 교회 리더십을 도와, 소외받은 자/ 어둠에 갇혀 있는 이들에게 포근한 자리를 내어주는 귀한 사역을 감당해 가기를 소망합니다.

깜뽀지아/유윤철

하비 수해 극복 간증: 허리케인 하비와 우리교회

By | e참빛

다행히 우리 집은 이번 허리케인 하비로 인한 피해는 없었지만, 이 허리케인은 내가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세 번째 물난리가 된 것 같다. 첫 번째는 아버지가 경험하신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이다. 당시 이재민이 37만 명이었는데, 당시 중학교 3학년이었던 아버지는 그다음 해에 사범학교에 진학하여 초등학교 선생님이 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사라호 태풍으로 집과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여덟 식구가 겨우 남은 소 한 마리만을 끌고 경북 영덕 지풍면에서 나의 고향이 된 강구면으로 피난 왔다고 한다. 이 사라호 태풍은 선생님이 되고 싶었던 아버지의 꿈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렸고 그래서 아버지는 그렇게 평생 매일 일을 마친 뒤 저녁에 술을 드시면서 넋두리를 하셨다. 두 번째 물난리는 내가 중학교 때였던 1980년대 중반에 왔었던 태풍이다. 태풍 이름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우리 동네 저수지의 둑이 무너지면서 우리 집 아래채가 물에 잠겨서 동네에 있는 태권도 학원 2층으로 피난 갔던 기억이 난다. 다행히 우리 집 위채는 잠기지 않았고 동네 어른들이 힘을 합하여 무너진 둑을 빨리 복구를 해서 더 이상의 피해는 없었지만, 많은 동네의 집들이 물에 잠겼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이번 2017년 8월 말에 휴스턴을 강타했던 허리케인 하비이다. 하비는 앞의 두 태풍과는 다르게 기억될 것이다.

멕시코만에서 하루가 다르게 에너지를 얻고 커지고 있던 허리케인 하비였지만 이렇게까지 직접 느끼게 될 것이라고는 짐작도 못 했다. 그동안 휴스턴에서 몇 번의 큰 허리케인을 맞았고, 허리케인 리타가 왔을 때는 샌안토니오까지 대피하기도 했고, 아이크 때는 휴스턴에 남아서 온전히 허리케인의 위력을 보기도 했지만, 우리 집에 피해는 없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비가 좀 많이 오는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을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목자 수련회를 잘 마친 토요일부터 내리는 비가 그칠 기미가 없고, 이사 와서 7년 만에 처음으로 집 주변의 호수가 넘치는 것을 보았다. 다행히 넘친 물이 우리 집이 있는 동네로 들어오지 않고 큰길로 빠져나가서 비가 그친 후 주변 도로가 잠겨서 며칠 동안 집안에만 갇혀 있기는 했지만, 덕분에 일주일 동안 회사 출근을 하지 않고 집에 있을 수 있었다. 휴스턴 전역의 홍수 피해는 뉴스로 계속 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허리케인 하비도 그냥 지나가는 휴스턴의 연례행사 중 하나에 불과했고, 2005년에 뉴올리언스를 강타했던 허리케인 카트리나만큼 위력이 있다고는

하지만 그냥 나와는 상관없는 일인 듯했다. 우리 교회에서 조직된 복구팀에 참여해서 직접 청소하러 가기 전까지는…

허리케인 하비가 지나간 이후 첫 일 주일 동안 간헐적으로 청소가 필요하다고 교회 수해 복구 카톡방에 요청의 글이 올라오기는 했지만, 우리 집과는 멀고 많은 사람이 자원해서 그냥 지켜 보고만 있었다. Labor day 아침, 일면식도 없는 어떤 형제님 집에 도움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올라왔는데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지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집에서 30마일 이상 떨어져 있었고 가서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몰랐지만, 그냥 나도 참여해서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으로 아침 일찍 출발해서 갔는데, 실제로 보니 그 피해 정도가 TV로 보는 것과는 매우 달랐다. 그 집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아주 작은 다리를 건너기 전에 몇몇 사람들이 테니스를 치고 휴일을 즐기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을 보았는데, 그 다리를 넘으니까 완전히 다른 세상이었다. 길가에는 벌써 건물 잔해와 카펫들이 산더미처럼 나와 있는 집도 있었고, 물이 얼마나 찼었는지 보여주는 자국도 있었고, 그냥 물에 잠겼던 자기 집을 밖에서 망연자실 바라보는 사람도 있었다. 청소할 집에 도착했을 때 벌써 몇몇 형제, 자매님들이 와서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집사님 한 분과 더불어 교회 사람들이 모여서 같이 기도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내 기억으로 한 3~4시간 정도 청소작업을 했던 것 같다. 처음에 그 폐허와 같은 집을 봤을 때는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연했는데, 몇몇 형제님들이 이미 다른 집 복구작업 경험이 있어서 그분들을 중심으로 언제 시작했는지 모르게 금세 청소가 끝나갔다. 그리고 피해를 본 당사자인 부부도 함께 청소하는데 정말 씩씩하게 일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었다.

그날 함께 작업했던 한 형제님은 아직 자기 집은 물에 잠겨 있지만, 물이 빠지기 전에 먼저 도움이 필요한 곳에 왔다고 했다.

참 믿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자신의 집은 아직 물속에 잠겨있는데 어떻게 다른 집을 먼저 돕겠다는 생각이 들 수 있을까?

목요일 오전에 우연히 그 형제님 집에 가서 청소하였다. 일 층의 모든 것이 물에 잠겨 있었다. 또, 집사님 한 분은 내가 가는 곳마다 만났다. 목요일에 회사 휴가를 내서 갔던 곳에서도 만났다. 그 집사님은 허리가 아프지만, 집에 있을 수만은 없어서 거의 매일 나와서 복구 현장에 나오고 있다고 했다. 만약 이 물이 잠긴 집이 자신의 집이라면 허리가 아파도 뭐라도 했을 거라고 하시면서 발걸음을 재촉하셨다. 매일 이곳저곳 복구현장을 바쁘게 다니시는 다른 집사님 한 분은 복구팀 작업에 집중하라고 요즘 사업이 좀 더디다고 하셨다. 사업이 더딘 것을 걱정하기보다는 복구팀에 참여할 수 있어 기뻐하시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정상 출근을 하는 평일에는 일손이 부족 할 것으로 생각했는데 최소한 내가 참여했었던 곳에는 사람이 부족했다기보다는 넘쳐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자원자들이 많은 만큼 복구, 청소도 빨리 끝났다. 정말 많은 분이 내 집인 것처럼 열심히 일하고 기쁘게 작업하는 모습을 보았다. 왜 6.25 전쟁 때 중국군의 인해 전술에 국군이 밀렸는지 이번에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에 시작할 때는 언제 끝낼까 했는데, 20~30명이 함께 일을 하니까 시작하기가 무섭게 작업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또 놀라운 것은 복구 작업을 하시는 분들이 알아서 척척 자기가 할 일들을 찾아서 쉬지도 않고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감독관이 필요가 없었다. 또 하나 더, 복구 작업 나가서 평소보다 점심을 더 잘 먹었던 것 같다. 점심때가 되면 수해 입은 분이 속해 있는 목장의 목녀님이 점심을 준비해 주셨고, 아니면 교회에서 자발적으로 구성된 점심 준비 지원팀에서 배달해 주어서, 점심 걱정이 없었다. 역시 우리 교회는 뭘 하더라도 잘 먹이는 것 같다.

천여 명 출석하는 교회에서 그렇게 많은 수해헌금을 드리는 것을 보고 또 놀랐었다. 그리고 그 헌금을 아무런 잡음 없이 잘 집행하는 교회가 우리 교회라는 사실이 너무 감사했다.

이번 허리케인 하비를 통해 도움을 주고받았던 감사의 글들을 교회 게시판에서 읽으면서 행복한 느낌이 들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지 보았다. 아내는 이번 허리케인 하비로 인해 처음으로 ‘우리 교회’가 된 것 같다고 한다. 교회라고는 휴스턴 서울교회가 처음인 우리 부부가 다른 교회들과는 비교는 할 수는 없지만, 휴스턴 서울교회의 구성원이라는 것이 너무나 자랑스럽다. 확실히 우리 교회가 특별한 것일까? 모든 교회가 이렇게 투명하고 섬김과 헌신이 넘치는 교회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뉴델리/김태범

하비 수해 극복 간증: 하비는 현재 진행 중

By | e참빛

9월에 가족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었습니다. 집 떠나는 여행이 달갑지만은 않은 연세의 부모님께도 떼쓰듯이 하여 승낙을 받았습니다. 생각만 해도 행복했습니다. 9월이면 날씨도 좋아질 테니까요. 하지만 12월이 된 지금까지도 가족 여행을 못 가고 있습니다. 여행은 고사하고 일 년의 4분의 1 이상을 집 복구 작업에 매달려 있습니다. 집이 예전과 비슷하게라도 되려면 앞으로도 한참 더 걸릴 것 같습니다.

-Beltway 8 & Boheme- Beltway 8 턱 밑까지 차오른 물

지난 8월 25일 금요일, 비바람과 천둥, 번개가 온종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밤이 되자 우지끈거리며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더 크게 들렸습니다. 휴스턴에서 폭우는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지만 이번에는 마음이 영 편치 않았습니다. “별일 없을 거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그날 밤새 기상 채널을 켜 놓고 자느라 잠을 설쳤습니다. 26일 토요일도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습니다. 근처 Creek과 Bayou에서 넘친 엄청난 양의 물이 동네 길을 수로 삼아 빠르게 흘렀습니다. 자고 나니 물이 무릎까지 차 있더라는 집, 뒷마당에 물이 허벅지까지 올라왔다는 집 등 무거운 소식들이 들려왔습니다. 오후가 되자 몇몇 이웃들이 집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혼자 남아 집을 지키고 엄마와 아이들만 빠져나가는 가족들도 있었습니다. 등에 커다란 배낭을 메고, 우비를 입고, 물 덜 찬 곳을 골라 밟으며 한 줄로 걸어가는 낯선 광경에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중요한 서류며 아끼던 물건들 몇 가지를 선반 위로 올려놓았습니다. 27일, 동네 일대가 하나의 거대한 호수로 변했습니다. 집에는 아직 물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길이 막혔으니 갇힐 수도 있겠다 싶어 가까이 사는 자매들 집으로 피했습니다. 짐은 간단하게 쌌습니다. 하루 이틀 지나 물이 빠지면 돌아올 것으로 생각했으니까요. “집에 물 안 들어오게 해 주세요.” 불안한 마음으로 기도드렸습니다. 비가 그치고 수위가 안정되자 마음이 좀 놓였습니다. 게다가 연이틀 저수지를 개방했는데도 집이 괜찮았습니다. “하나님, 정말 감사합니다!” 기도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날 밤 며칠 만에 처음 편안한 마음으로 단잠을 잤습니다.

다음 날 아침 깨어보니 이웃들에게서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습니다. 막바지까지 잘 버티고 있던 집들인데 결국 물이 들었답니다. 우리 집 역시 문틈으로 스멀스멀 기어들어 온 물이 순식간에 집안을 꽉 채웠습니다. 그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니 이내 서운하고 야속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어젯밤 감사 기도도 드렸는데…”

9월이 되었습니다. 비도 그쳤고 저수지 문도 더는 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동네는 아직도 호수인 채로 고립되어 있었고 16피트가 넘는 Beltway 8에는 턱 밑까지 올라온 물이 출렁거렸습니다. 집에 들어왔던 물은 하루 만에 빠져나갔지만, 곰팡이가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차가 동네에 못 들어오니 곰팡이가 피기 전에 물건들을 손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쓰레기 봉지에 물건을 넣고 양손에 들었더니 봉지가 물에 닿았습니다. 어깨에 메었더니 더 무거웠습니다. 머리에 이니 좀 나았습니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첨벙거리며 물을 건너는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동생들과 배가 당기도록 웃었습니다. “울지 않고 웃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드렸습니다. 그리고는 밤이면 몸살로 끙끙 앓았습니다. 주일날 저희 목장 박덕규 목자님과 원광우 형제님이 가슴까지 wader를 입고 물을 건너 들어오셨습니다. 참으로 든든하고 반가운 지원군이었습니다. 곧이어 홍성제 목자님이 오셔서 큰 짐들을 번쩍 들어 옮겨 주셨고, 석태인 집사님과 석영이 목녀님께서 짐 옮길 가방을 바람의 속도로 가져다주셨습니다. 대충 짐을 옮긴 후 호수 한가운데에 빈집을 덩그러니 놓고 오는 마음이 매우 쓸쓸했습니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감사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하나님, 이분들이 오늘 흘린 땀과 수고 꼭 기억해 주세요.” 코가 석 자인 제가 다른 분들을 위해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휴스턴서울교회 Harvey 수해복구팀-

대망의 9월 9일 오전 9시, 목장 식구들, 초원 식구들, 분가 전 목장 식구들, 다른 목장 식구들이 속속 모여들었습니다. 마스크, 장갑, 커터는 물론이고 화려한 장비들이 마구 등장했습니다. 벽 뜯기 달인들과 뒤처리 달인들의 환상적인 조합, 먼지를 함빡 쓰시고도 걱정하지 말라고 웃어 주시던 하호부 집사님, 하인덕 목녀님과 김희숙 목자님, 엊그제 무거운 짐 옮기면서 허리에 무리가 갔는데도 꿋꿋이 짐을 나르시던 박덕규 목자님, 매처럼 정확한 눈으로 벽 제거 작업을 이끄신 원광우 형제님, drywall cutting 솜씨가 프로의 경지에 이른 집사님들과 형제님들, 꼬맹이 막내를 업고라도 오겠다는 유다운 목녀님과의 경쟁에서 이기고 달려와 준 황길동 목자님, 30인분 점심 식사를 정갈하게 만들어 보내준 조혜승 목녀님, 힘들지 않냐고 물었더니 재미있다고 싱긋 웃던 중학생 김원희, 제일 일찍 도착해서 땀범벅으로 묵묵히 일하시던 박찬규 목자님, 채화정 목녀님. 회사 출근하는 날 외에는 매일 피해 가구 순회 서비스를 하신 소준영 목자님, 오승민 목녀님. 얼굴도 모르는 사람 집에 와서 노동 제대로 하고 가신 장미숙 자매님, 이신 형제님 등 VIP분들, 목자님들, 목녀님들, 형제, 자매님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분의 도움으로 벽과 바닥을 일사천리로 뜯어내고 젖은 가구와 물건들을 집 밖으로 옮길 수 있었습니다. 이분들이 아니었다면 과연 어디서부터 무엇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듭니다. 4피트 높이로 벽을 뜯어낸 집은 날씬한 각선미를 뽐내며 시원하게 뻥 뚫렸습니다. 하지만 저의 마음은 형언할 수 없는 감사와 미안함으로 가득 찼습니다. 집 앞마당에는 물에 젖어 색이 번지고 찢어진 사진들, 낡았지만 익숙한 물건들, 고마운 사람들이 준 선물들, 아껴서 장만하고 행복해하던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였습니다. 쓰레기 수거 차의 커다란 집게 끝에 매달려 가족의 품을 떠나는 물건들을 보면서 마치 지나온 세월과 추억이 깨지고 던져지는 듯한 복잡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필 같은 날 에어컨까지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하러 오신 분이 요즘 수해 입은 집들 에어컨 수리를 많이 하는데 본인 집은 괜찮다고, 그래서 “I feel guilty.”라고 말했습니다. 그 한 마디에 꾹 참아온 눈물이 이때라며 터져 나왔습니다. 처음 만난 분이지만 고마웠습니다. 힘든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도 감사의 충분조건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 날입니다. 후에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잘 안다.” 하시면 아마 저는 엉엉 울 것 같습니다. 슬퍼서가 아니라 알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입니다.

허리케인 하비가 다녀간 지 석 달이 훌쩍 넘어 어느새 12월이 되었습니다. 그간 벽과 바닥 공사를 끝냈습니다. Astros의 승리에 환호도 했고, 높아진 하늘도 가끔 올려다봅니다. 그렇다고 낯설고 불편한 상황이 종료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저에게 허리케인 하비는 현재 진행 중이고 아직도 그 영향권 안에 있습니다. 처리해야 할 일은 줄을 이었고, 떠올리면 마음 아픈 기억들도 여전히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놀랍고 신기한 일은 하비가 저에게는 통로로 쓰이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통로를 통해 매일 현재 진행으로 느끼는 감사함이 녹록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는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제는 하비 때문에 속상하다고 불평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번 수해로 잃은 것보다 남겨주신 것이 훨씬 많고, 새로 주시는 것은 더 많을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비록 시간과 물질을 잃었지만, 그보다 무한대로 더 중요한 가족의 안전과 건강을 남겨 주셨고, 예배 때마다 빠지지 않는 하비 피해자를 위한 기도와 격려, 소중한 목장 식구들의 사랑, 복구팀을 비롯한 성도님들의 헌신을 거저 받게 해 주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새로운 감사 거리를 주실지 궁금하고 기대됩니다. 약할 때 강함 주시는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산로렌조/구희경

 

하비 수해 극복 간증: 그 날…

By | e참빛

<그 날>

“우리 집에 물 들어와!!”

2017년 8월 27일 주일 새벽. 낮고 다급한 남편의 목소리가 집 안에 퍼지던 그 순간, 평화롭던 우리 세 식구의 삶은 완전히 깨어졌다.

창 밖은 어스름했고 현관과 뒷뜰로 나가는 문 사이로 물이 들어오고 있었다. 숨을 멈추고 이불을 꺼내 물을 막기 시작했다. 두꺼운 이불들이 바닥에 닿자마자 흥건해졌다. 잠에서 깨어 두리번거리는 아이에게 새로운 장난감을 쥐어주며 크립에 가두고, 나는 바스켓으로 남편은 펌프로 물을 퍼냈다. 심장이 쿵쾅거리고, 우리는 쉴 새 없이 움직이고 있었지만, 집 안의 적막감은 깨어지지 않았다. 간혹 아이가 내뱉는 “엄마! 물! 배!”만 울려 퍼질 뿐 우리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남편이 다시 한번 선언했다. “자기, 물 퍼지마. 소용없어”

물은 참으로 조용히, 그러나 무섭게 밀려들어 오고 있었다. 카펫을 겨우 적시던 물은 사방에서 밀어닥치며 순식간에 발등을 덮었고, 어느새 발목까지 올라와 있었다.

창밖의 도로, 길 건너편 집과의 사이의 도로, 잔디밭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동네를 잠식한 흙탕물과 보트를 꺼내는 몇 사람만 보일 뿐이었다.

<집을 떠나던 날 아침. 이 길 끝에서 이경태 형제님이 기다리고 계셨다. 남편이 아이를 안고 우산을 쓰고 걸어오고 있다.

‘도로가 다 물에 잠겼나보다. 우리 집이 고립이 되었나보다. 집 안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오늘 밤은 지붕에 매달려서 보내야 하는 것은 아닌가. 25개월 된 아들이 배고픔과 추위를 견딜 수 있을까…’ 그럴 수는 없었다. 아이만이라도 내보내야 했다.

이경태/김소형 가정에 구조 요청을 했다. 다행히 잠기지 않은 길을 찾아 와주시겠다 했고, 혼자 남아 집과 운명을 같이 하겠노라는 남편을 설득하여 함께 나가기로 했다.

밖으로 나가는 뒷문 앞에 섰다. 문밖은 어떤 모습일까, 이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그야말로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는 것은 아닐까. 쉽사리 문을 열지 못하고 뒤돌아 집을 바라보았다. 먹고, 자고, 울고, 웃으며, 우리의 삶을 이어가게 했던 그 공간을 두고 떠나는 마음이 너무나 찹찹했지만 설마 물이 천장까지 차지는 않겠지. 이 비만 그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크게 달라지지는 않은 모습으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빈집을 노리고 도둑이 들지만 않는다면 아주 많은 것을 잃어버리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남편은 아들을 등에 업고, 나는 배낭 하나 멘 채로 집을 나섰다. 물에 잠겨가는 집과 차를 등 뒤에 둔 채, 우산을 바치고 저 멀리 마른 도로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허리까지 차오른 물이 점점 얕아지는 길 끝에 이경태 형제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집, 책>

우리가 두고 떠난 그 집은 아이가 태어나 평생(25개월)을 보낸 곳이었다. 아이는 그곳에서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났으며, 온종일 활개를 치며 구석구석 뒤엎고 다녔다. 집안 어디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아빠보다도 더 잘 알고 있었으며, 온통 ‘하민이꺼’로 가득한 공간이었다. 아이에게는 자신이 목을 가누고, 앉고, 서고, 처음으로 엄마를 불렀던 아주 익숙한 그곳만이 자신의 집이었다. (3개월이 지난 지금도 아이는 물이 들어 온 그 집을 ‘하민이 집’, 현재 임시로 거주하는 곳을 ‘새 집’이라 부른다.)

많은 사람에게 그렇듯이 우리 부부에게도 그 집은 ‘평생’ 혹은 ‘전부’를 의미했다. 우리 두 사람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의 일종의 결과물이었으며, 우리의 남은 여생 대부분을 그 집에서 보낼 생각이었다. 그 집에는 많은 추억이 있었으며, 많은 물건이 있었다. 큰 돈을 지불했던 물건부터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소장품들이 있었다. 그 어떤 작은 것도 우리의 과거와 연결되어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이 없었다.

홍수 후, 무너져 내린 책장

홍수 전, 우리가 특별히 사랑했던 책들

특별히 그 집에는 대략 1,500권 정도의 책이 있었다. 나는 성경과 더불어 그 책들을 통해 구원의 깊은 은혜를 깨달았고,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생겼고, 나의 정체성과 세계관을 잡아갈 수 있었다. 그 책들에는 하나님 앞에서 내 머리가 뚫리고 가슴이 울렸던 뜨거운 흔적들이 남아 있었고, 책 제목을 훑어보는 것만으로도 내 삶의 흐름이 눈에 들어왔다. 남편의 책도 마찬가지였다. 나에겐 남편의 책을 바라보는 것이 잔잔한 행복이었는데, 남편의 책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만나기 전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고 살았고,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냈는지 그려졌다. 우리는 그 책들을 평생 곁에 두고 싶었고, 우리 아이에게도 이 책들이 의미를 가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사라졌다. 집은 지붕과 뼈대만 남았고, 책을 비롯한 대부분의 물건이 내버려 졌다.

<어려움>

텅 빈 집은 표현할 수 없는 깊은 상실감과 허탈함을 몰고 왔다. 남편은 지금까지 직장 생활해온 것이 다 날아간 것 같다고 했다. 왜 아닐까.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사람인데 자신이 사랑하고 아끼던 책을 다 잃어서 마음이 너무 아프다고도 했다.

현실적으로는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줄을 이었다. 차 두대를 새로 사고, 임시 거처 렌트비를 내고,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을 새로 마련하고, 집을 치우고 수리하는 이 모든 것이 계획에 없던 지출이었다. 경제적인 부담은 차치하고서라도, 복잡하고 번거로운 절차들의 반복이었으며 한 번에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우리의 규칙적이던 일상은 사라졌고 하루하루가 다른 불안정한 생활이 이어졌다. 종일 엄마한테만 매달리는 두 살배기를 데리고 이사를 하고, 필요한 물건들을 구하러 다니고, 정보를 알아보고 신청하는 일들로 하루가 채워졌다. 처리해야 할 일들은 산적했고, 세 식구가 오붓이 보내는 시간이 사라지며 우리의 마음도 말라가기 시작했다. 남편은 회사 일과 복구 일을 병행해야 했고, 나는 집안의 필요와 남편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고, 사랑스럽기만 했던 아이는 계속되는 환경의 변화에 힘들어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미 ‘하비’를 잊고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우리는 단 하루도 ‘하비’로부터 파생된 일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과거의 모습을 재현해 내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상황이 답답했다.

집에 물이 차오르던 그 순간, 나는 살려달라고 기도했었다. 가족 모두 안전할 수 있었기에 감사하지만, 살아남은 이후의 생활은 버거웠다. 지금의 상황만으로도 감사 할 것이 많지만, 그것이 온전한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피한 더 큰 어려움을 누군가는 직면하고 있을 텐데, 그것을 감사의 이유로 삼기에는 마음이 불편했다. 절대적인 감사가 필요했다.

<감사의 이유>

집을 떠나 피난 생활을 한 지 딱 일주일 되던 날, 주일예배 시간이었다.

“이 ‘한 번 더’라는 말은 흔들리는 것들 곧 피조물들을 없애버리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흔들리지 않는 것들이 남아 있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히 12:27)” 설교 본문 말씀을 읽는데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쏟아졌다. 와르르 무너진 우리 집 책장이 떠오르고, 그 위로 흔들리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가 영광스럽게 겹쳐졌다.

나의 진짜 소유는 홍수에 쓸린 이 땅의 집이 아니라 나의 아버지께서 거하시는 그곳이라는 사실이 매우 현실감 있게 다가왔다.

그 예배는 내가 휴스턴에 살면서 드린 최고의 예배였고, 그 이후, 내 몸은 비록 이 거대 도시를 휩쓴 풍파 가운데 있지만 내 영혼은 안전하다는 안정감이 나를 지배했다. 비록 나의 책들은 사라졌지만, 그 책을 통해 깨닫게 되었던 하나님의 절대적인 선하심과 견고하심에 대한 신뢰는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뿌리내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강한 손으로 나를 붙들어 주셨다.

서울침례교회 복구팀. 많은 분들이 오셔서 이틀에 걸쳐 청소와 demolition을 해주셨다

교회와 목장에서는 즉각적이고 현실적인 도움을 제공해주었다. 피난을 준비하던 그 순간부터 목장과 초원을 통한 현황 파악이 이어졌고, 설교와 기도에 힘이 더해졌고, 음식과 옷가지 등 급하게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주셨다. 마치 온 교회가 비상체제에 돌입한 것처럼, 그 어느 국가의 재난 컨트럴 타워보다도 더 민첩하게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댈 곳 하나 없는 낯선 땅에서, 교회가 없었다면 우리 세 식구는 ‘그 날’ 어디로 가야했을까. 위험을 무릅쓰고 구조하러 와 주시고, 임시 거처를 찾을 때까지 집을 오픈하여 섬겨주시고, 자동차를 빌려주시고, 필요한 물건과 음식을 챙겨주시고, 얼굴도 몰랐던 분들이 시간을 내어 집 복구를 해주시고, 갖가지 물건을 기부받아 편하게 가져갈 수 있도록 배려해주시고, 특별 헌금으로까지 지원해주시고.. 온교회가 하나가 되어 자신의 일처럼 발벗고 나서 준 것은 감사를 넘어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함께 아파해주시고, 걱정해주시고, 손을 내밀어 주시는 분들이 계셔 우리는 큰 일이 그렇게 크게 느껴지지 않았고, 끊임없는 도움과 위로 받게 하심으로 주저앉지 않고 견딜 수 있었다. 한 번의 친절은 선의만 있다면 베풀 수 있지만, 이렇게 지속적이고 한계를 뛰어넘는 섬김은 오랜 훈련이 있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뿐만 아니라 수해 직후 시작 되었던 삶 공부(부모 세미나) 덕분에 우리 가족은 말씀을 붙들고 대화와 기도를 할 수 있었고, 당황스러웠던 아이와의 관계에 정말 큰 도움이 되었다.

복구 작업 후 집 내부

복구 작업 후 집 외부

내 평생 이런 일을 당하리라 상상조차 하지 못한 일을 겪고 있지만, 그 덕분에 많은 것을 깨닫고 배우고 있음 또한 감사하다. 결혼 전 나의 이상형은 ‘위기대처능력이 뛰어난 남자’였다. 당시 내가 생각했던 위기대처능력이란 순발력이 뛰어나고 뻔뻔한 구석도 좀 있는 그런 이미지였던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꾀는 부리지 못하지만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분 앞에 무릎을 꿇는 남편과 가정을 이루게 하셨고,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단 한번도 의심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이 위기를 잘 대처해가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행복은 환경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기쁨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진짜 나에게 고난이 닥쳤을 때 그럴 수 있을까 했는데, 하나님과 이웃의 사랑을 통해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잃은 것 같지만 그 중에서도 나에게도 나눌 것이 있게 하시고, 그것을 기꺼이 나눌 때 내 안에 새로운 힘과 기쁨이 생기는 신비를 알게하심 역시 감사하는 부분이다.

<현재>

‘그 날’ 이후로 3개월이 넘게 지났다. 주변의 도움과 기도로 재난 중에 감사했던 첫번째 달이 지나고, 힘들어할 겨를조차 없이 바쁘게 보냈던 두번째 달이 지나고, 지친 몸과 마음이 극에 달했던 세번째 달도 지나갔다. 집 복구 방법을 결정하는 과정은 매우 힘들었고, 공사가 겨우 시작되기는 했지만 제거작업에서 머물러 있고 언제쯤 끝이 날지 기약도 없다. 이제 피난민의 생활은 익숙해졌지만, 원래 보금자리로 돌아가 삶이 안정되기까지는 아직 긴 여정이 남아있다. 하지만 이렇게 기쁠 때 웃고, 힘들 때 울며 한 사이클을 보내고 보니, 그 어떤 굴곡에도 사라지지 않는, 내 삶을 이끌어 가시는 한 분이 보인다.

비록 육신은 터널을 지나고 있지만 내 영혼에 햇빛 되어주시는 나의 예수님, 어두움 속에서 더욱 환하게 빛나는 그 빛은, 미풍에도 쉽게 요동치는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다.

바얀아울 목장/이신아

하비 수해 극복 간증: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선물이다

By | e참빛

허리케인 ‘하비’로 인한 수해 극복을 주제로 한 간증문을 모집한다는 교회 광고가 있었지만, 워낙 많은 분이 피해를 보았고 또 저보다 다른 분들이 훨씬 많은 간증 거리가 있지 않을까 싶어 아예 응모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는데, 이번 달에 있었던 수요 목장 발표 때에 제가 간증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어, 그때 했던 간증 내용을 토대로 별 특별할 것은 없으나 믿음 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들을 함께 나눴으면 하는 마음에서 용기를 내었습니다.

수요 목장 발표날을 며칠 앞두고 갑작스레 목녀님이 원래 내정되어 있던 형제가 사정상 간증을 못 하게 되었으니 대신 간증을 해줄 수 있겠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어 왔을 때, 별로 생각해 보지도 않고는 덥석 “네”라고 대답해버렸습니다. 일단 대답은 명쾌하게 했지만, 특별한 간증 거리가 떠 오르지 않아 참 난감했습니다. ‘무슨 간증을 해야 하지? 2년 전에 얼떨결에 간증을 한 뒤로 꽤~ 시간이 흘렀는데, 그동안 내게 간증할만한 신앙의 변화가 있었나?’라고 생각해보니 그다지 크게 달라진 것도 없는 듯하였습니다. 이렇게 간증 거리를 찾지도 못한 채 그냥 며칠을 정신없이 바쁘게 지내다 보니 어느덧 목장 하는 날이 되었고, 부지런히 일을 마무리하고 목장으로 향하는 중에 문득 2년 전, 전 목장 발표 때 했던 제 간증 내용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그때는 막 VIP(초신자를 칭하는 말)를 벗어난 뒤라서 의리 때문에 파트타임 목원에서 풀타임 목원으로 전환하며 의무감에 시작하게 된 금요 목장과 일요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에 대한 마음의 갈등들을 얘기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니, 비록 작지만, 저에게도 지난 2년 동안 믿음 생활을 하면서 이런저런 내면의 변화가 있었다는 걸 새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중에서 크게 두 가지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첫째는, 언제부터인지 정확한 시점은 알 수 없어도, 2년 전과는 다르게 매주 목장과 교회에 나오는 것이 더는 의리 때문이 아닌 자연스러운 제 생활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별로 대단할 게 없는 것 같은 변화지만, 항상 시간이 모자란 듯 사는 저로서는 일주일에 이틀이란 시간을 최우선순위에 올려놓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거든요.

둘째는, 언제부턴가 어떤 문제나 안 좋은 일이 생겨도, 예전에 비교하면 조금은 더 담담하고 긍정적으로 대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얼마 전에 휴스턴에 큰 피해를 주었던 하비가 그 좋은 예인 듯합니다. 저도 그 홍수 피해자 중의 하나였는데, 모두가 그랬듯이 아무도 예기치 못한 상황이고 별다른 대책도, 해결할 방법도 없는 상태였기에, 우선은 목장 식구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그 뒤에 교회 수해복구팀의 도움을 받아 잔여물을 거둬내는 작업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수리를 시작하여 지난달 말에 모든 것이 원상 복구되었습니다.

모든 게 끝나고 뒤돌아보니, ‘내가 어떻게 거의 매일 두 달 동안을 직장과 집수리 공사 두 가지를 병행하며 버텼을까? 휴우, 드디어 끝을 봤구나’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가며

‘아하, 그 시간을 버틴 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쓰러지지 않게 뒤에서 버팀목이 되어 주셨기 때문이었구나.’라고 깨달았습니다.

거의 날마다 밤 11시 정도까지 자잘한 일거리들을 처리하다 보면 몸이 지쳐가고 때때로 혼자 있노라면 무서운 생각도 들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혼자서 흥얼거리는 ‘나의 등 뒤에서’라는 찬송을 하나님께서 들으시며 나를 지켜보며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주셨기에 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예전과는 좀 달라진 저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전에는 지금과 똑같은 일이 생기면, 맨 먼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지?’라는 원망도 하고, 그저 인생을 대충대충 살아가는 사람들은 멀쩡한데, 나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이런 일이 생기는 건 정말 불공평하다는 생각에, ‘도대체 하나님이 계시기나 한 것인지’라며 투덜대기도 하며,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폭포수처럼 쏟아내곤 했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번에는 정말 정신적, 육체적 그리고 경제적으로 힘들고 지치는 상황이었음에도 단 한 번도 그런 불평하는 마음이 들지 않았고, 원망의 말도 내뱉은 적이 없었습니다. 다만, ‘이 엄청난 상황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하나? 하나님은 내가 어떻게 극복하는지 시험하시나?’라는 생각을 하는 한편, ‘별 뾰족한 방법이 없으니, 모든 것은 하나님께 맡겨놓고 나는 그 상황에 따라 최선을 다해 한번 부딪혀보지 뭐~. 길이 안 보이면 하지 말라는 것이고…’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며 덤벼들었습니다.

제가 집을 수리하겠다고 결정하고도 공사를 시작할 돈이 마련되지 않아서 주저하고 있는 시점에, 몇 년 전에 저와 일 관계로 알고 지내던 미국인 공사책임자 ‘에드가’라는 사람에게 제 사정을 얘기하고 견적이라도 받을 수 있냐고 전화를 했더니, 너무 큰 공사를 맡아서 견적이며 공사는 한두 달 뒤에나 할 수 있다는 답을 들었습니다. 게다가, 홍수 보험을 안 들었고, 제가 거주하는 집이 아니어서 FEMA의 도움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란 것도 알게 되고 나니, 이건 하나님이 집을 고치지 말라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덤핑으로라도 집을 넘겨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서류준비를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틀 뒤에 에드가에게서 연락이 와서 그다음 날, 우리 집 동네 근처에 볼일이 있어서 잠깐 들릴 일이 있는데 시간이 되면 견적은 내줄 수 있노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수리할 능력이 안 되는 걸 알았지만, 집을 처분하려 해도 고치는 비용을 알면 도움이 될 듯싶어 만날 약속을 하고 견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얘기를 나누던 중에, 제가 이번 일로 아무런 경제적 도움을 받지 못하게 되었고 해결할 능력도 안 돼서 시간이 너무 지체되면 더 많은 금전적 피해가 올 것 같아 서둘러 집을 처분하려 한다고 했더니, 아무 수리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집을 팔게 되면 집을 헐값에 넘겨야 하고 잘못하다간 돈도 더 물어내게 될 수도 있다며, 어떻게든 수리하는 게 좋을 거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집을 고칠 돈이 없어서 처분하려고 하는데 돈까지 물어낼 수도 있다니… 생각지도 못했던 상황에 머리가 멍한 상태로 있는 제가 안쓰러워 보였는지, 에드가는 제게 이런저런 얘기 끝에 한두 달 정도면 집수리비용의 반을 마련할 수 있겠느냐고 묻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정도의 시간이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럼 자기가 시간을 쪼개서 가능한 한 최소의 비용으로 일을 시작해 볼 테니, 공사대금은 공사가 끝날 때까지 반드시 지급한다고 약속하면 자기가 도와주겠노라고 선뜻 제의하는 것이 아닙니까?

제 귀를 의심할 정도로 믿기 힘든 제의였습니다. 지금같이 공사업자를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인 시기에 그것도 1000가구나 되는 아파트 공사를 하는 중인 사람이 당장 공사 대금도 없는 나를 위해, 본인이 직접 재료를 사서 일을 시작한다는 것은 누가 봐도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집수리를 하는 과정은 나의 계속되는 간증 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제가 믿기 힘들 정도로 그때그때, 사람들을 연결해주셨고 제 마음속의 소원까지 들으시는 것처럼 모든 일을 일사천리로 깔끔하게 마무리 짓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은 나의 상상을 뛰어넘을 뿐 아니라 타이밍도 기가 막힌다는 걸 새삼 깨닫게 해주셨습니다.

또한, 이번 일을 통해, 저는 ‘저에 대한 불편한 진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남을 돕는 것에는 전혀 주저하거나 망설임이 없는 데 반해, 제가 도움이 필요할 때에는 남에게 도움을 청하는 걸 무척이나 힘들어한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성향은 ‘어차피 모든 일은 내가 감당해야 하는데, 괜히 나 때문에 상대방까지 같이 힘들게 할 필요가 무엇이냐’라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 같고, 난 남의 도움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오만함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그런 제 성격이 믿음 생활을 시작하는데도 적지 않은 걸림돌이 되었고, 오랜 시간을 흘려보내고서야 믿음을 갖게 하였고, 그 후에도 예수님께 기대는 일이 무척이나 어색하고 힘이 들게 하였던 것 같습니다. 생명의 삶 공부를 수강한 뒤로는 예수님께 기대는 것은 훨씬 수월해졌지만, 여전히 사람들에게는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 같은 사람처럼 씩씩한 모습만 보여주려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수해를 당하고, 혼자 감당하기 너무 힘들다 보니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연락하라”는 목자님의 말씀에 반자동으로 SOS를 치고, 목장 식구들과 교인들의 도움의 손길을 받으면서… 모두 기꺼운 마음으로 웃으면서 그 힘든 잔해물 처리하는 일을 하시고, 작업하시는 분들을 위해 한 편에서는 김밥과 커피를 준비하여는 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고맙고 가슴이 먹먹해 오는 감동을 하였는지 모릅니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어색한 저를 대신해 조금이라도 도움을 받게 해주려고 여기저기 동분서주하는 목녀님과 다행스럽게도 교회에서 2차 성금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 일인 양 기뻐해 주던 목장 식구들, 시간 없어 끼니를 못 챙길까 걱정되어 음식들을 챙겨다 주시는 아파트에 입주해 계신 교우님들…

정말 필요할 때에, 그리고 지쳐있을 때 진심 어린 도움을 받으면 이런 마음이 드는구나 하는 정말 새롭고 가슴 뭉클한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남을 돕던 것은 그저 선행이었을 뿐, 예수님께서 제게 바라는 진정한 사랑의 섬김이 아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앞으로 남을 도울 일이 있을 때 어떻게 도와야 할지를 가슴으로 느끼고 경험할 좋은 기회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 수해는 저에게 물질적인 피해는 주었지만, 그 반면에 내가 놓치고 있던 나 자신을 알게 해 주었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이나마 믿음의 씨앗이 한알 한알 제 마음 주머니에 채워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그 믿음이 예수님 옷자락을 붙들고 많은 우리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힘든 시간을 아무 일도 없는 듯 밝은 모습으로 감내할 수 있게 해 주었고, 또한 많은 감사 거리도 덤으로 얻었습니다. 버틸 수 있는 정도의 피해만 주신 것, 다행히 직장에는 큰 피해가 없어 일자리 걱정을 하지 않게 해주신 것, 너무 고마운 공사업자를 보내주신 것, 수해를 당한 사람의 마음을 같이 공유할 수 있게 하신 것, 좋은 교회에 속하게 하신 것, 그리고 힘든 시간을 같이 걱정하며, 의지가 되어 주고, 수리가 거의 끝날 즈음에는 앉을 자리도 없는 곳에 임시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아직도 페인트 냄새가 가득한 곳에 함께 모여서 찬송과 축복의 기도를 드려주는 참 좋은 목장 식구들이 있는 목장에 속하게 하신 것, 등등.

‘장미꽃 가시에 감사한다’는 찬송가 가사처럼 고난도 하나님이 주신 또 다른 포장지에 싸인 축복의 선물임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하노이 목장/윤남이

하비 수해 극복 간증: 어려움 가운데 천국을 맛보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By | e참빛

목사님께서 이번 수해를 겪은 사람들의 수기를 모은다고 하실 때 ‘감사할 일이 넘치는 내가 당연히 수기를 써야지’ 하면서도 한편으론 부끄럽고 민망한 마음 때문에 선뜻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받은 도움이 너무 많았기에 힘들었다고 하소연할 것이 없었고, 받은 은혜가 너무 많아기에 마음에 남은 큰 상처가 없어서 쓸 내용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자랑으로 들리지 않을까하는  걱정이 먼저 앞섰습니다. 그러나 오늘 (11월의 마지막 날) 새벽 큐티중에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받은 은혜와 경험들을 겸손함을 핑계로 나누지 않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깎아내리는 교만한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때 주님께서 주신 말씀에 용기를 얻어 이번 수해로 얻은 은혜를 나누어 내가 경험한 하나님과 주님이 세우신 교회를 당당하게 자랑하겠습니다.

우리 가정을 향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은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시간을 거슬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언제나 그 계획 가운데 우리가 있다고 믿으면서도 끊임없이 의심하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물론 아직 그 옛 습성에 빠져 의심하는 마음이 불쑥 나올 때도 있지만, 이제는 그런 생각이 들면 마음을 진정시키고 잠잠히 주님의 일하심을 기다리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될 수 있게 된 것은 그간 우리에게 보여주신 주님의 일하심이 너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작년과 올해 9월은 저희 가정은 그것을 생생하게 경험했습니다. 작년 9월 한국으로 영주권 인터뷰를 보러 나간 신랑이 거절 레터를 받았다는 전화에 저는 어찌할 줄 몰라 하는데 정작 신랑은 하나님이 일하시고 계시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기에 나를 위로하기 위한 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주 만에 다시 승인 도장을 받고 휴스턴에 계획된 3주보다 딱 2주 늦은 5주 만에 돌아온 신랑을 보면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맘을 졸이며 괴롭게 기다리던 그 5주의 시간 동안 저를 위해 기도해주고 마음 써주던 목장, 초원, 교회 식구들의 존재의 귀함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음을 써주며 용기를 주고 도와주는 교회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그때 저희 부부는 넘치게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을 어찌할까 고민하다 매주 감사헌금을 드리기로 결단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기에 결심이 쉽진 않았지만 한번 헌신한 후엔 별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감사한 한 해를 보내고 ‘2017년은 평탄히 지나가는구나’ 하던 찰나 9월의 첫 주일날 아침 영화와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일찍 일어나 평소와 같이 교회 갈 준비를 하려던 중 비가 많이 와서 교회 예배가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놀라 집 뒤 주차장을 확인하니 벌써 물이 꽤 올라와 있었습니다. 사실 저희 타운 홈은 메모리얼 중간에 가장 피해가 컸던 타운 중 하나로 저희가 주차장을 확인하는 그 시간,단지 안쪽의 집들은 벌써 집 안에 물이 들어오는 중이었다고 합니다. 큰 길 바로 옆쪽 건물이라 물이 늦게 들어오는 것도 모르고 설마 하면서 혹시 모르니 짐이나 싸놓자고 옷가지 몇 개를 챙기기도 하고 아침을 챙겨 먹기도 하며 여유를 부렸습니다. 그때 급작스럽게 현관을 통해 물이 들어오고, 목장 식구와 부모님이 번갈아  전화를 하며 당장 집에서 나오라고 하기에  당장 다음날 아이의 등교를 위한 책가방과 옷만 챙겨 집에서 빠져나왔습니다. 다행히 길가에 위치한 집이라 물이 많이 차지 않아 걸어 나갈 수 있었고 친정아버지가 큰 트럭으로 데리러 와주셔서 별 어려움 없이 친정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바닥만 젖겠지…설마 더 차진 않겠지…하며 큰 걱정을 하진 않았습니다. 살던 집이 단층집이라 중요한 것들을 2층으로 옮길 수도 없었기에 물이 들어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할 상황이었기에 비가 그치게 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 다음날 비가 그치고 물이 조금 빠졌을 때 들어간 집은 물이 들어왔다 빠진 상태로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지만 집을 치우려면 동네에 물이 다 빠져야 하니까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동안 휴스턴시에서 댐을 방류하는 일이 생겼고, 빗물이 빠졌던 동네가 그 전보다 더 깊은 물 속에 잠겼습니다. 중간중간 집을 확인하러 가서 보니 물에 완전히 잠겼고 방류된 물이 고인 메모리얼의 참혹한 상태는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였습니다. 남은 짐이라도 챙겨야 하는 상황에 처음엔 맨몸으로 물살을 이겨내며 들어간 집의 상태는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습니다. 억지로 쌓아 올린 짐들은 다 무너져 내려있었고 무거운 냉장고 2대도 쓰러져있었습니다. 담담하게 집 상태를 확인하다가 딸아이가 새 학기라고 직접 고른 런치백이 더러운 빗물 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을 보고 갑자기 울음이 터졌습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솟구치며 이유도 모르는 눈물을 흘렸습니다.그저 하찮은 런치백일 뿐인데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픈지도 모르게 울며 돌아 나오던 그 날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런치백을 보며 눈물을 흘리던 저는 물질에 참 많은 뜻을 두고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땐 그저 아이의 물건이라 그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아이에게 믿음의 유산보다는 물질적인 유산을 먼저 물려주려 했던 저의 속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던 순간이었습니다. 저와 신랑은 무슨 일에서든 아이를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신앙생활, 부부 생활 등에서 가장 시험에 들게하는 문제가 아이의 문제인 것을 느끼고 그것을 이겨내게 해달라고 기도할 정도였습니다. 신랑은 신랑대로 그 동안 아이에게 사랑의 표현으로 수없이 해주었던 선물들이 물 위에 떠다니는 모습에 조용히 마음 아파했고 저는 저대로 열심히 일한 신랑의 피와 땀이 섞인 세간살이들이 망가진 모습에 쓰린 가슴을 어찌할 줄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아픔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워낙에 염려가 많은 성격의 저에게 당연히 밀려와야 할 앞날의 문제에 대한 압박감이 들이 않았습니다. 처음엔 너무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런가 보다 할 정도로 염려가 되질 않았습니다. 어디 모아둔 돈이나 살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미국 생활 10년 이상의 살림살이는 아직도 물속에 잠겨있는 상태였는데도 말입니다. 오히려 목장 식구들에게 큰 수해가 없음을 감사하며 신랑과 감사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바쁜 일상과 여러 개인적인 문제를 핑계로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던 친정 부모님과 마음의 거리를 줄일 수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마음 편하게 기댈 수 있는 부모님이 가까이 사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느끼게 되었고 그 이후로 더욱 부모님과 가깝게 지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편안하면서도 위태로운 며칠이 지나고 물이 빠져서 복구를  시작해야 할 때가 왔지만, 빚지기 싫어하는 성격의 저희는 복구팀에 도움 요청하는 것도 괴로워 미루다 주변의 강권으로 막판에 겨우 복구를 시작하였습니다. 물이 빠지고 난 집은 곰팡이와 악취로 가득하였기에 냄새나는 것이라도 먼저 버리려고 신랑과 둘이 치워보았지만, 하루 봉일 하여도 일은 진척되지 않았고 목장 식구의 도움으로 챙길 수 있는 짐만 간신히 챙겨서 복구팀을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복구 팀의 빡빡하고 바쁜 일정 가운데 늦게 신청한 탓에 많이 오시지 못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와주셔서 놀랐습니다. 복구 당일 익숙한 우리 교회 식구분들과 낯선 형제님들이 오셔서 재빠른 손길로 청소를 해주셨습니다. 처음엔 마스크에 가려 잘 알아보지 못해 잘 모르는 교회분인가 했던 여러 명의 장정분은 알고 보니 그날 새벽 휴스턴에 도착하여 바로 달려와 주신 달라스 뉴송 교회 식구분들이었습니다.그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고, 도우러 오셔서 우리보다 더 안타까워 해주신 그분들의 마음과 손길에 감사했고, 이런 손길의 통로가 되어 준 우리 교회에 감사했습니다. 이렇게 또 채워주시는 손길에 감사하다는 말 밖에는 어찌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도우러 오신 목녀님들은 세밀한 손길로 깨끗한 짐을 하나라도 더 챙겨주려 하셨고 또 여기저기서 음식으로 도와주신 덕에 나중엔 온 이웃 집의 사람들과 나누어 먹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그때 가지고 있던 세간살이 거의 모두를 버리느라 집 앞에 쌓아가는데 그 일을 돕던 형제님이 버릴 수밖에 없는 짐들을 보며 안타까워하실 때 저도 모르게

“ 괜찮아요! 이제 하늘에 쌓으면 되는데요 뭘!” 하며 웃을 수 있었습니다. 나 자신이나 누군가를 위로하고자 함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고백할 수 있던 것이 제가 자랑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후에도 교회를 통한 도움과 이웃들의 도움은 끊임이 없었습니다. 그 무엇보다 같이 피해를 본 이웃들과 서로 진심으로 걱정하고 도왔던 것은 순간 ‘천국이 여기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의 감동과 기쁨이 넘치는 경험이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교회를 다녔지만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없습니다. 내가 휴스턴에 오지 않았더라면, 서울 교회에 다니지 않았더라면…이런 경험들은 쉽게 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 일들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신 하나님을 자랑하지 않는다면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교만임이 분명함을 이 글을 쓰며 다시 한번 느낍니다.

저희 가정은 아직 여러 면에서 수해에서 회복되는 중이지만 저는 더는 염려하지 않습니다. 곁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고 도와주시는 이웃과 교회가 있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살아서 일하시고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믿음의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야 함을 잊지 않고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쌓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주시는 상이고 그곳을 쌓을 곳은 하늘나라임을 이젠 잊지 않겠습니다

어려움 가운데 천국을 맛보게 해주신 하나님과 교회에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이포목장 / 심혜미

생명의 삶 간증: 나를 통해 가정을 구원시켜 나가시는 하나님

By | e참빛

결혼전 저는 하나님을 모른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게된 사건이 있었는데요. 그것은 결혼이었습니다. 그러면 남편이 믿는 사람인가 보다 생각하시겠지만…… 아닙니다. 지금으로부터 10년전인 2007년 유학생인 남편을 따라 미국에 오게되었습니다. 오자마자 1달만에 임신과 낯설고 외로운 외국 생활에 예민해지고 불안하던 저는 한국사람이라도 만나게 한인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지 않던 남편은 저를 데려다 주기 위해서 교회를 갔고 전 교회를 다닌 지 2년째되는해 새벽기도를 하던 중 하나님의 만나고 회개하고 치유가 되는 은혜를 경험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리 남편이 저를 전도한거나 다름없습니다.

그 후 2010년 한국에 취직이 되어 가게 되었고 한국에서도 저는 교회를 찾아 신앙생활을 하며 하나님이 믿어지것이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겐 큰 위로가 되고 좋았습니다. 하지만 믿으면서도 성경이 너무나 어렵게만 느껴지고 이해하기가 어려워서 잘 읽어지지 않아 말씀을 멀리 하고 살았습니다. 둘째까지 생겨 겨우 교회만 출석할 뿐 믿음이 성장하거나 성령님이 이끄시는 삶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하나님말씀은 저의 마음에 전혀 요동이 없이 여전히 용서가 안돼는 사람이 있었고 나의 생각과 뜻이 안 맞으면 이해하기 보다 그냥 싫었습니다. 남편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나의 의가 살아 날뛰기를 반복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의 가장 큰 문제는 남편과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사랑과 말씀과 은혜없는 신앙생활을 하다보니 남편에게 신앙을 강요하고 정죄하는 일이 많았고 교회에 나가지 않는 남편과 자꾸 트러블이 생기고 생각의 차이는 해가 갈수록 점점 더 멀여져만 갔습니다. 나만 노력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불평과 불만이 가득했습니다.급기야 교회를 안 나갈거면 이혼하자고 막말까지 하게 됐습니다. 그후 결과는 이혼할 뻔 했습니다. 다행히 지금까지 잘 살고 있지만, 그런 위기들이 몇 번씩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준 남편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던 중 2016년 작년 여름 제가 갑상성암 진단을 받아 수술을 하게 됐습니다. 항상 노후 대책을 생각하던 저에겐 그때 ‘아~~~~내가 노후가 없을 수도 있겠구나! 내가 당연히 노후까지 살지않을까?’ 라는 나의 미래를 내가 정하고 판단하는 죄를 지고 대단한 착각을 하며 살았던 저는 회개의 눈물과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 했습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며 너와 너희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이 가정이 구원을 얻게 하시려고 나를 먼저 믿게 하셨는데 나의 자아가 살아있어서 하나님의 자리가 없었다는걸 깨닿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려는 훈련과 함께 이 가정에서 썩어진 밀알로 복음의 씨앗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결단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특별히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한 불쌍한 마음을 주셔서 중보 기도도 그 전보다 더욱더 열심히 하게 됐습니다. 그렇지만 열정과 마음에 비해 어디서 배울때도 없고 들을때도 없었던 저는 인터넷을 보며 성경공부하고 은혜가 있는 설교를 여기저기 찾아 듣고 어떻게든 순종하고 삶에 적용해 보려고 애를 쓰며 그렇게 갈급함 속에 있었고 남편이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기회가 빨리 오기만을 소망하고 있던 그때!!!!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되었고 휴스턴 서울교회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생명의 삶공부등록과 함께 공부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죄 와 하나님 사랑, 신앙, 회개, 거듭남…… 남편이 꼭 들어야할 복음을 명료하면서도 쉽게 설명해주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그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함께 먹고 그는 나와함께 먹을 것이다.” 이수관 목사님께서 이 말씀을 조근 조근 설명하시는 데……마음의 문을 쪼금이라도 열어드리면 예수님은 발을 탁 걸치고 비집고 들어오신다. 그만큼 우리를 구원해주시길 원하신다고 설명 하실 때 그 순간 남편이 마음의 문이 열어 예수님이 들어가실 수 있도록 속으로 잠깐씩 기도하며 그렇게 강의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천국 소망을 새롭게 가지게 되었는데요. 

천국을 막연한 이미지로 가지고 있던 저는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목사님께서 구체적으로 설명해주시는 내내 마치 내가 천국에 와있는 기분이 들며 점점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천국은 아니였습니다. 아무튼, 천국을 잠시 잠깐 맛보는 꿀맛 같은 시간이었습니다.이렇게 저희는 11주간의 생명의 삶을 마무리해 갈 때쯤 영접 모임에 들어 갔습니다. 사실 남편이 워낙 말로 표현을 하지 않고 속내를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기에 그 때까지도 예수님을 영접할 마음이 되어있는지 아닌지는 전혀 잘 몰랐습니다. 영접모임이 끝나갈 무렵 목사님께서 영접 하실 분은 눈을 감고 손을 들라고 하셨는데 그때 옆에앉아있던 남편자리에서 부시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실눈을뜨고 보니 남편이 손을 번쩍 들고 있는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너무 좋은 나머지 얼떨결에 저도 손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영접하신분들 기도를 한 명씩 시키시는 데 남편 차례가 되어 남편이 말을 하는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남편은 자신의 고집을 내려놓고 믿어 보겠다고 결단하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고집이란 단어를 듣자마자 10년 묵었던 체증이 그 순간 가슴속에서 쑥~~~~~빠져나가는 기분이었습니다. 평펑울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많아서 꺼억꺼억 나오는 울음 소리를 삼키며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침례헌신도 미루지않고 당장하겠다고 하는것이였습니다. 이게 왠일입니까?? 할렐루야~~~아멘 기도응답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구원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제가 생각지도 못한 떄에 이렇게 구원의 기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하시니 이렇게 속전속결! 하나님 진짜 정말 사랑해요~~ 남편을 향한 구원계획에 때를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지만 점점 지쳐있던 저에게도 큰 위로의 선물이 되었습니다. 그 동안 남편에 대한 서운하고 미운 감정들이 다 사라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예쁘던지…… 그날 저녁 평소와는 다른 나의 과한 친절한 태도를 보며 어색해 하던 남편이 한마디 하더군요 니가 언제 변할지 모르겠다며 …… 그래서 그랬죠 내 사랑은 좀 변해도 하나님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요. 제 사랑도 변하지 않도록 당연히 노력 해야겠죠.

영접 침례헌신이후 특별히 변화된 점은 매주 목요일 가족 목장을 하게 됐다는것입니다. 남편 두 딸들과 함께 감사뿐만 아니라 힘들고 슬펐던 일을 그리고 기도제목을 나누며 기도하는 가정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9살 큰딸은 “아빠! 하나님, 예수님 믿어~ 안 믿는 것보다 훨씬 마음이 편해, 아빠..장래도 생각해야지”라며 종종 이런 빵 터지는 편지를 주곤 하던 큰딸은 누구보다 더 아빠의 영접을 축하해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살면서 중요하면서 아주 시급한 구원문제를 해결주시고 응답해주신 하나님께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옌지/박주미